
장동일 개인전
over + lay '영겁의 존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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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4. 10 (수) ~ 4. 16 (화)
✔ AM 11:00 ~ PM 19:00
✔인사1010 갤러리 1관, B관 (지하, 1층)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0길 10
✔무료관람
✔갤러리 문의 : 010 3393 8780
✔화요일은 설치 철수로 인해 전시관람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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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영겁의 존재에서 잠재성의 실재를 구성하는 ‘겹’으로의 부화
변 청 자 | 미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상자 안을 균질하게 채우고 있는 얼룩덜룩한 메추리알의 배열 속에서 유난히 흰 알 하나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장동일의 <알> 시리즈는 고립된 자아의 표상(表象)에서 출발했다. 고립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알 자체보다는 정형적인 형태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작가의 알 시리즈는 타원형의 형태뿐 아니라 프레임의 사각형이 유난히 강조되거나, 자로 잰 듯 균등한 화면 배분, 알을 둘러싼 색면의 균질함 등으로 강박에 가까운 정합성을 만들어낸다. 캔버스 프레임이 만들어내는 경직성 안에서 타원형의 알은 인지심리학의 측면에서는 형(形)과 지(地)가 너무 명료해서 그저 ‘알’만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형에 해당하는 알의 바탕인 균질한 색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화면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색면이 관객의 시야 너머까지 확장되지만, 그렇다고 발길을 뒤로 물릴 수는 없다. 그림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알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딱 그 자리에 관객을 서 있게 한다. 메추리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져 버린 알과 마주하는 순간 관객의 시야를 벗어난 색은 실제 화면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고 넓게 관객의 몸을 감싼다. 색의 정감에 빠져든 관객에게 화면 속 알은 더 이상 실재(the real)가 아니다. 크거나 작은 크기에 개의치 않으며, 중앙에 떠 있는 알이 중력에 어긋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화면 속 알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순간이라는 시간적 속박에 빠지지도 않으며, 곧 아래로 떨어져 깨질 것 같은 의심이나 불안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알이 떠 있는 무중력 상태가 관객에게 전이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에서 분리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밤하늘에 무심하게 떠 있는 별들처럼 혜량(惠諒)할 수 없는 우주 안의 작은 먼지조차도 힘의 균형상태 내지는 그러한 순간이듯 화면 속 알도 그렇게 모든 힘의 작용을 온전하게 받아 안고 있다. 작은 메추리알의 재현(再現)에서 시작한 작가의 알 시리즈는 숨구멍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짜인 질서정연함으로 나아갔다. 그 속에서 알은 생명의 잉태라는 은유적 메타포를 상실한 채 시공간이라는 차원이 소멸한 고요한 공허를 그려내고 있다. 다만, 작가는 이런 고립감을 극복하고 해소해야 할 부정적 요인으로 보기보다는 어떠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감지할 수 없는 고요한 상태의 지속을 힘있게 끌고 가면서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면 안 되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던 장동일의 그림 속 알들이 변하고 있다. 알의 고립감을 달콤한 도넛이나 화려한 보석과 대치시켜 보기도 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나 자연을 연상시키는 나무판 위에 놓아두면서 욕망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사물이나 자연물의 부분이 현실을 연상하게 하면서 화면 속 알들은 정말 ‘하나의 알’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알 속에 꽁꽁 담아두었던 자신을 서서히 알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시도이다. 알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알을 보기 위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러자 정합적이고 견고하던 화면에 시선(視線)이 담기고 있다. 중앙에 놓여있던 알들이 화면 한쪽으로 물러나거나, 알이 여러 개로 복제되는가 하면 화면 너머까지 확장되어 자신이 알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전 작업에서의 알이 고립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표상했다면 최근의 작업에서는 현재 또는 현실적인 것과 공존하는 들뢰즈(G. Deleuze)의 잠재성(virtuality)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잠재성은 가능성과 다르다. 가능성(possibility)이란 상상적인 것으로서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로부터 상상 되고 예측되는 현실의 이데올로기, 즉 허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능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기존 현실의 재현이나 클리셰(cliché)들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이에 반해 잠재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다.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으며, 곧이어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실재적이고 창조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 속 알이 뻔한 메추리알이 아니라 잠재성 그 자체가 되게 하기 위한 장치로 화면에 ‘겹(layer)’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새롭게 도입한 재료가 한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색 초지이다. 닥나무를 물에 풀어 뜰채로 얇게 떠낸 초지를 사용하는 것은 겹이 막이 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종이 위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성긴 섬유질들이 모여 구멍이 숭숭한 면이 된 초지에 색을 입히는 선염(渲染) 방식은 관객이 색을 시각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삼투압처럼 물들고 번지게 하여 온전하게 몸으로 감지하게 한다.
화면 속 알은 여전히 타원형의 정형성을 지니고 있지만, 겹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은 내부와 외부, 알과 바탕의 경계를 모호하게 무효화시킨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이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듯 여러 겹의 색 초지들이 쌓이고 밀리면서 앞선 흔적들을 숨기고 드러내고 있다. 어떤 때에는 부분으로 전체를 암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알이 특정한 공간을 유영하고 있으며, 때로는 엑스레이로 촬영하듯 안팎의 여러 겹을 투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그림 속 ‘알’들은 새로운 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 부화의 끝이 반드시 메추리는 아니리라는 것만을 명확히 한 채 작가 자신도,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도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작가는 그 결정권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장동일 작품 세계의 화려한 변신을 예고하면서 벌써 다음에 드러날 알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알의 존재의미는 껍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알은 껍질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고 껍질에만 주목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말할 때, 우리가 고양이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상자에 주목하는 것처럼 장동일의 알들은 이제 껍질이라는 외피 너머의 무한한 잠재성의 실재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2024년 4월 2 일
장동일 개인전
over + lay '영겁의 존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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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4. 10 (수) ~ 4. 16 (화)
✔ AM 11:00 ~ PM 19:00
✔인사1010 갤러리 1관, B관 (지하, 1층)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0길 10
✔무료관람
✔갤러리 문의 : 010 3393 8780
✔화요일은 설치 철수로 인해 전시관람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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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영겁의 존재에서 잠재성의 실재를 구성하는 ‘겹’으로의 부화
변 청 자 | 미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상자 안을 균질하게 채우고 있는 얼룩덜룩한 메추리알의 배열 속에서 유난히 흰 알 하나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장동일의 <알> 시리즈는 고립된 자아의 표상(表象)에서 출발했다. 고립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알 자체보다는 정형적인 형태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작가의 알 시리즈는 타원형의 형태뿐 아니라 프레임의 사각형이 유난히 강조되거나, 자로 잰 듯 균등한 화면 배분, 알을 둘러싼 색면의 균질함 등으로 강박에 가까운 정합성을 만들어낸다. 캔버스 프레임이 만들어내는 경직성 안에서 타원형의 알은 인지심리학의 측면에서는 형(形)과 지(地)가 너무 명료해서 그저 ‘알’만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형에 해당하는 알의 바탕인 균질한 색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화면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색면이 관객의 시야 너머까지 확장되지만, 그렇다고 발길을 뒤로 물릴 수는 없다. 그림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알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딱 그 자리에 관객을 서 있게 한다. 메추리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져 버린 알과 마주하는 순간 관객의 시야를 벗어난 색은 실제 화면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고 넓게 관객의 몸을 감싼다. 색의 정감에 빠져든 관객에게 화면 속 알은 더 이상 실재(the real)가 아니다. 크거나 작은 크기에 개의치 않으며, 중앙에 떠 있는 알이 중력에 어긋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화면 속 알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순간이라는 시간적 속박에 빠지지도 않으며, 곧 아래로 떨어져 깨질 것 같은 의심이나 불안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알이 떠 있는 무중력 상태가 관객에게 전이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에서 분리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밤하늘에 무심하게 떠 있는 별들처럼 혜량(惠諒)할 수 없는 우주 안의 작은 먼지조차도 힘의 균형상태 내지는 그러한 순간이듯 화면 속 알도 그렇게 모든 힘의 작용을 온전하게 받아 안고 있다. 작은 메추리알의 재현(再現)에서 시작한 작가의 알 시리즈는 숨구멍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짜인 질서정연함으로 나아갔다. 그 속에서 알은 생명의 잉태라는 은유적 메타포를 상실한 채 시공간이라는 차원이 소멸한 고요한 공허를 그려내고 있다. 다만, 작가는 이런 고립감을 극복하고 해소해야 할 부정적 요인으로 보기보다는 어떠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감지할 수 없는 고요한 상태의 지속을 힘있게 끌고 가면서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면 안 되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던 장동일의 그림 속 알들이 변하고 있다. 알의 고립감을 달콤한 도넛이나 화려한 보석과 대치시켜 보기도 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나 자연을 연상시키는 나무판 위에 놓아두면서 욕망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사물이나 자연물의 부분이 현실을 연상하게 하면서 화면 속 알들은 정말 ‘하나의 알’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알 속에 꽁꽁 담아두었던 자신을 서서히 알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시도이다. 알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알을 보기 위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러자 정합적이고 견고하던 화면에 시선(視線)이 담기고 있다. 중앙에 놓여있던 알들이 화면 한쪽으로 물러나거나, 알이 여러 개로 복제되는가 하면 화면 너머까지 확장되어 자신이 알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전 작업에서의 알이 고립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표상했다면 최근의 작업에서는 현재 또는 현실적인 것과 공존하는 들뢰즈(G. Deleuze)의 잠재성(virtuality)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잠재성은 가능성과 다르다. 가능성(possibility)이란 상상적인 것으로서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로부터 상상 되고 예측되는 현실의 이데올로기, 즉 허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능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기존 현실의 재현이나 클리셰(cliché)들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이에 반해 잠재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다.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으며, 곧이어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실재적이고 창조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 속 알이 뻔한 메추리알이 아니라 잠재성 그 자체가 되게 하기 위한 장치로 화면에 ‘겹(layer)’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새롭게 도입한 재료가 한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색 초지이다. 닥나무를 물에 풀어 뜰채로 얇게 떠낸 초지를 사용하는 것은 겹이 막이 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종이 위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성긴 섬유질들이 모여 구멍이 숭숭한 면이 된 초지에 색을 입히는 선염(渲染) 방식은 관객이 색을 시각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삼투압처럼 물들고 번지게 하여 온전하게 몸으로 감지하게 한다.
화면 속 알은 여전히 타원형의 정형성을 지니고 있지만, 겹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은 내부와 외부, 알과 바탕의 경계를 모호하게 무효화시킨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이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듯 여러 겹의 색 초지들이 쌓이고 밀리면서 앞선 흔적들을 숨기고 드러내고 있다. 어떤 때에는 부분으로 전체를 암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알이 특정한 공간을 유영하고 있으며, 때로는 엑스레이로 촬영하듯 안팎의 여러 겹을 투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그림 속 ‘알’들은 새로운 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 부화의 끝이 반드시 메추리는 아니리라는 것만을 명확히 한 채 작가 자신도,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도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작가는 그 결정권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장동일 작품 세계의 화려한 변신을 예고하면서 벌써 다음에 드러날 알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알의 존재의미는 껍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알은 껍질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고 껍질에만 주목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말할 때, 우리가 고양이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상자에 주목하는 것처럼 장동일의 알들은 이제 껍질이라는 외피 너머의 무한한 잠재성의 실재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2024년 4월 2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