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3.18 (수) ~ 3. 23 (월)
✔ 3관
✔ AM 11:00 ~ PM19:00
✔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0길 10
✔ 무료관람
✔ 갤러리 문의 : 010 3393 8780
✔ 화요일은 설치 철수로 인해 전시관람이 불가합니다.



작가의 말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잠시 앉았는데 불현듯 죽는다는 것에 생각이 빠지는 일이 있었다. 얼마나 몰입이 심했던지 이상한 메스꺼움이 올라와 탈출하다시피 숨을 거두어 쉬며 정신을 차렸다. 어린 나이에 죽음에 대해 사색한다고 하긴 그렇고, 아마도 막연히 생겨난 두려움이 공포감으로 급팽창하는 심리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그 일은 다행히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생명이 끊기고 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때 느끼는 모든 감각이 끊긴다는 점에 강하게 몰입했던 거 같다.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생명이라는 것이 끊어지고 굳이 연속하지 않는다는 점.
몇 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 입시 준비 압박을 받던 때였다.
어떤 상황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숙제 하듯 읽었는데 입시가 끝난 후 오이디푸스, 오레스테스 등의 이야기를 차츰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는 그 이전부터 읽은 적이 있었고 화려한 장면과 상상을 넘어서는 신비스러움에 매혹되기 일쑤였으나 비극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비극이라는 것은 운명과 생명의 끊김(죽음)에 연관하고 있다.
운명과 죽음은 비극이 생겨나는데 어떤 복잡한 역학 관계의 구조 틀을 만든다.
비극은 주로 예견되는데 윤곽을 드러내고 사건의 결말을 이루면서 그 모습을 비춘다.
비극을 형성하고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흩어지고 무대에서 사라지더라도 비극의 본성은 마치 음계의 한 노트가 끊이지 않고 울리듯 어떤 파장을 만든다. 이 장(場)은 확고하고 연속적인 것 같다.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모두가 퇴장해도 비극은 그 자체로 연속한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비로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게 된다.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사고를 아주 새롭고 먼 지평선 너머까지 거침없이 끌고 간 내용을 발견하면서 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하였다. 이후로 이러한 요소들은 내가 갖는 정념에 큰 영향을 주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를 두개의 축으로 여기고 사고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운명의 본질을 아주 단순한 개념으로 바라본다고 할 때 일종의 “설계”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수정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설계, 그래서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설계.
이런 설계는 메시지를 통한 신호에 의해 알려지는데, 음악적 일수도 있고 조형적 일수도 있겠지만, 이 신호는 기하학적 형태의 기호로 간주하는 것이 직설적 이면서 효율적일 것이다.
왜나면 비극 발현의 신호는 내재적(intrinsic) 이고 결말의 형태와 거의 동시적 (synchronized) 성격이므로 그 것을 담고 보여주는 장(場)의 성질은 기하학적 구조 형태가 알맞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기하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이와 무관하지 않나 질문해 본다.
기하학은 감각을 넘어 이데아(형상)를 사유하는 훈련 아닌가.
어찌되었든 이 기호는 비극 당사자들 간에 놓여있는 기류를 최대한 온전히 느낄 수 있게 구성된다.
운명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연속적 요소로 분류해 볼 수도 있지만, 비극의 종착 지점에 발생하는 죽음과 함께 확인되고, 바로 그 순간 운명의 역할은 멈추고 끊기므로 비연속적 요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1984년 그리고 1985년에 대략 열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당시 몇 점은 기획전을 통해 전시된 적이 있지만, 40여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개인전을 통해 모두 함께 보이고자 한다.
생각해보니 인생의 많은 부분이 지나간 셈이다.
더 늦기 전에, 젊은 날의 이 그림들을 몇 일간 만이라도 한 장소에 모아 걸어 놓고 흐려져가는 당시 열정의 추억을 자극해 내 스스로를 보듬는 성의를 표하고 싶다.
비연속적인 것(생명의 끊김)과 비연속적 일수도 있는 것(운명)을 토대로 연속적인 것(비극)이 형성될 수 있듯이 시간과 공간을 토대로 우리가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모든 것이 쉽게 연속적으로만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한 예로, 디지털 음원을 듣는 것에 비해 LP 판 아날로그 음원으로 들으면 그 따스한 음색이 다른 것처럼 우리의 감각은 연속적인 것에 더 완만하고 끈끈하게 다가간다.
그렇다. 비극은 외면하기 어렵다.
비극을 응시하고 긴장하며 가슴을 움켜잡는 건 괴롭지만, 우리가 중력장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는 것 만큼이나 어찌할 도리 없이 자연스럽다.
다른 차원에서의 이야기도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지는 어떤 흐름이 아닌, 각각이 따로따로 그리고 한꺼번에 설정되어 있는 비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가설이 있다. 시간의 최소 단위 (Plank time)도 비연속적 단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지막지한 우주의 비연속적 환경 안에 꼼짝없이 갇힌 채 연속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만 감각하게 하는 완고한 착각의 그물망 (matrix) 안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조각가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 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두 손 이다. 무릎에 올린 손과 턱을 받치고 있는 손 각각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제의 조형적 비율보다 심도가 높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 인물을 표현할 때 크고 흰 손의 모습이 떠오른 것 같다. 너무 큰 나머지 그 인물을 뒤덮고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흰 손.
원치용
<비극의 탄생>
✔ 2026.3.18 (수) ~ 3. 23 (월)
✔ 3관
✔ AM 11:00 ~ PM19:00
✔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0길 10
✔ 무료관람
✔ 갤러리 문의 : 010 3393 8780
✔ 화요일은 설치 철수로 인해 전시관람이 불가합니다.

작가의 말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잠시 앉았는데 불현듯 죽는다는 것에 생각이 빠지는 일이 있었다. 얼마나 몰입이 심했던지 이상한 메스꺼움이 올라와 탈출하다시피 숨을 거두어 쉬며 정신을 차렸다. 어린 나이에 죽음에 대해 사색한다고 하긴 그렇고, 아마도 막연히 생겨난 두려움이 공포감으로 급팽창하는 심리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그 일은 다행히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생명이 끊기고 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때 느끼는 모든 감각이 끊긴다는 점에 강하게 몰입했던 거 같다.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생명이라는 것이 끊어지고 굳이 연속하지 않는다는 점.
몇 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 입시 준비 압박을 받던 때였다.
어떤 상황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숙제 하듯 읽었는데 입시가 끝난 후 오이디푸스, 오레스테스 등의 이야기를 차츰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는 그 이전부터 읽은 적이 있었고 화려한 장면과 상상을 넘어서는 신비스러움에 매혹되기 일쑤였으나 비극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비극이라는 것은 운명과 생명의 끊김(죽음)에 연관하고 있다.
운명과 죽음은 비극이 생겨나는데 어떤 복잡한 역학 관계의 구조 틀을 만든다.
비극은 주로 예견되는데 윤곽을 드러내고 사건의 결말을 이루면서 그 모습을 비춘다.
비극을 형성하고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흩어지고 무대에서 사라지더라도 비극의 본성은 마치 음계의 한 노트가 끊이지 않고 울리듯 어떤 파장을 만든다. 이 장(場)은 확고하고 연속적인 것 같다.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모두가 퇴장해도 비극은 그 자체로 연속한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비로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게 된다.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사고를 아주 새롭고 먼 지평선 너머까지 거침없이 끌고 간 내용을 발견하면서 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하였다. 이후로 이러한 요소들은 내가 갖는 정념에 큰 영향을 주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를 두개의 축으로 여기고 사고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운명의 본질을 아주 단순한 개념으로 바라본다고 할 때 일종의 “설계”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수정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설계, 그래서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설계.
이런 설계는 메시지를 통한 신호에 의해 알려지는데, 음악적 일수도 있고 조형적 일수도 있겠지만, 이 신호는 기하학적 형태의 기호로 간주하는 것이 직설적 이면서 효율적일 것이다.
왜나면 비극 발현의 신호는 내재적(intrinsic) 이고 결말의 형태와 거의 동시적 (synchronized) 성격이므로 그 것을 담고 보여주는 장(場)의 성질은 기하학적 구조 형태가 알맞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기하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이와 무관하지 않나 질문해 본다.
기하학은 감각을 넘어 이데아(형상)를 사유하는 훈련 아닌가.
어찌되었든 이 기호는 비극 당사자들 간에 놓여있는 기류를 최대한 온전히 느낄 수 있게 구성된다.
운명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연속적 요소로 분류해 볼 수도 있지만, 비극의 종착 지점에 발생하는 죽음과 함께 확인되고, 바로 그 순간 운명의 역할은 멈추고 끊기므로 비연속적 요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1984년 그리고 1985년에 대략 열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당시 몇 점은 기획전을 통해 전시된 적이 있지만, 40여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개인전을 통해 모두 함께 보이고자 한다.
생각해보니 인생의 많은 부분이 지나간 셈이다.
더 늦기 전에, 젊은 날의 이 그림들을 몇 일간 만이라도 한 장소에 모아 걸어 놓고 흐려져가는 당시 열정의 추억을 자극해 내 스스로를 보듬는 성의를 표하고 싶다.
비연속적인 것(생명의 끊김)과 비연속적 일수도 있는 것(운명)을 토대로 연속적인 것(비극)이 형성될 수 있듯이 시간과 공간을 토대로 우리가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모든 것이 쉽게 연속적으로만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한 예로, 디지털 음원을 듣는 것에 비해 LP 판 아날로그 음원으로 들으면 그 따스한 음색이 다른 것처럼 우리의 감각은 연속적인 것에 더 완만하고 끈끈하게 다가간다.
그렇다. 비극은 외면하기 어렵다.
비극을 응시하고 긴장하며 가슴을 움켜잡는 건 괴롭지만, 우리가 중력장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는 것 만큼이나 어찌할 도리 없이 자연스럽다.
다른 차원에서의 이야기도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지는 어떤 흐름이 아닌, 각각이 따로따로 그리고 한꺼번에 설정되어 있는 비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가설이 있다. 시간의 최소 단위 (Plank time)도 비연속적 단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지막지한 우주의 비연속적 환경 안에 꼼짝없이 갇힌 채 연속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만 감각하게 하는 완고한 착각의 그물망 (matrix) 안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조각가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 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두 손 이다. 무릎에 올린 손과 턱을 받치고 있는 손 각각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제의 조형적 비율보다 심도가 높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 인물을 표현할 때 크고 흰 손의 모습이 떠오른 것 같다. 너무 큰 나머지 그 인물을 뒤덮고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흰 손.